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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및 교육 정보

고려시대의 교육

by KEI-C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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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고려를 이전 삼국시대의 고대국가들과는 다른 기틀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고대국가의 면모를 벗어나 중세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중심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서 유교의 원리를 중심으로 채택한 것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왕건은 훈요 10조를 통해 유교의 자세로 정치에 임할 것을 후대의 왕들에게도 당부하였습니다. 고려의 국교는 여전히 삼국시대와 같이 불교였지만 통치이념으로는 유교를 택한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고려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의 학교 교육

유교 국가로 나라를 정비하기 위해 고려의 왕들은 교육제도 완비를 우선 과제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성립된 나라로 특권층인 호족의 회유와 관련하여 지방의 교육제도 또한 신경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앙의 교육과 지방의 교육을 모두 제대로 완비하기 위하여 유교 국가로서 성장하는 데 힘썼던 고려 시대의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교육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자감

고려시대의 대표 관학인 국자감은 고려의 가장 상위의 고등교육기관이었습니다. 국민들을 유교적 이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학교의 근원이 유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국자감이 설립된 연유도 있겠으나 관리 선발 제의 등용문으로써의 역할을 위해서도 국자감은 필요하였습니다. 고려는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도입합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세습 귀족의 권력 영향도 관직 등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고려의 왕들은 중앙집권을 위해 과거제도의 활성화되길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과거제도의 활성화는 교육의 중요성, 즉 학교가 필요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왕권 안정을 위하여 학생들에게 공부의 기회, 즉 관리 등용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였고 그것이 바로 학교의 필요성이 된 것입니다. 국자감은 6개의 학교와 4등급의 입학 자격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의 학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각 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들만 국자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서인들의 경우는 율ㆍ서ㆍ산학에만 입학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9년 과정이었으며 율ㆍ서ㆍ산학은 6년 과정이었습니다. 

국자감 교관의 호칭은 박사와 조교였습니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은 학생 정원이나 규모의 면에서 다소 작긴 했지만 당의 국자감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당의 국자감이 사문학 학교까지 서민에게 개방되었던 것을 보면 고려의 국자감이 더 폐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국자감은 예종 때에 이르러 7재가 설립되었습니다. 7재는 지금의 학교에 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종 4년에 국자감에 7개의 전공 반이 생성된 것입니다. 7재 중 6재는 유학에 관련된 문반이었나 1개의 반은 무예 전공반이었던 점도 당의 국자감과 차이 나는 부분입니다. 강예재는 무예 전공의 반이었습니다. 예종 14년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가 설치되었습니다. 양현고의 재원이 바닥나자 충렬왕 때에는 섬학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후생 경비를 확보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은 왕권 강화와 맞물려 있었기에 국자감은 왕의 권위이자 국가의 권위를 대표했습니다 섬학전 제도까지 만들어 가면서 양현고의 재원을 확보하려 한 부분은 그런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고려 국자감의 정원이 너무 많은 나머지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고 국자감의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지방학교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에 의해 건국된 나라입니다. 그 때문에 건국 초부터 지방의 교육제도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려의 지방학교가 처음부터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아니고 중국과 인접한 중요 지역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종 때에 전국의 12목에 박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향교가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박사 파견은 지방의 호족 자제들을 수도로 불러 수학하도록 한 일종의 볼모 제도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경습업제도라고 합니다. 명분상으로 지방 학교가 없으니 지방의 권력자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교육해 주고 편의를 봐주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조은 이들 호족 자제들 중 희망하는 이들을 귀향시키면서 교육제도 또한 정비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교육도 신경을 쓰게 된 것입니다. 호족 자제들을 귀향시키면서 12목에 박사들을 파견하여 지방 교육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세워진 지방학교가 바로 향교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고려의 향교가 발전하여 조선의 향교가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선의 향교와 고려의 향교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직 그 이론이 정착되지 않은 학자들의 설명 부분은 넘어가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바탕으로 고려시대 지방학교의 변천사를 보면 태조 13년에 중국 인접 지역에 지방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성종에 전국 12목으로 확대한 것까지는 공통사항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인종 5년 각 주에 설립 확대를 하였고 고려말 정몽주에 의해 지방학교는 더 증설되었습니다. 이는 처음에는 경, 그 후에 목, 그리고 주로 설립이 확대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방학교가 행정단위 크기로 점점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가장 작은 단위인 현까지 확대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학당

학당은 고려말에 등장한 중앙의 학교입니다. 원종 때에 동서학당으로 시작하여 정몽주에 의해 5부 학당으로 증설됩니다. 학당은 기록으로 보아 향교와 비슷한 수준의 학교로 보입니다. 최고 학부인 국자감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학당은 국자감 보다는 아래의 교육기관이었고 교수하는 교육 내용과 수준이 달랐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 상급 교육은 국자감의 몫이었고 하급 교육은 학당의 몫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학

고려시대의 특이점으로는 사학의 성행을 들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의 멘토와 멘티처럼 교사와 학생들의 사적 무리를 '도'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사학 12도, 즉 12 무리는 매우 유명합니다. 사학인 '도'의 교육 장소는 유동적이어서 여름에는 시원한 곳, 겨울에는 따뜻한 곳으로 옮겨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산수를 누비며 심신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도와 비슷한 부분입니다. 사학이 처음부터 12개의 무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도'로 출발했던 것이 인기가 많아지자 다른 사람들도 '도'를 만들게 되어 나중에 유명한 12개의 무리, 사학 12도가 생긴 것입니다. 그중에서 사학의 시초에 해당하는 최충의 문헌공도가 가장 유명했습니다. 최충은 과거 급제후 왕을 5대에 걸쳐 요직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사학을 세워 가르쳤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몰리게 되자 9재로 분반하여 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사학 12도는 국자감의 재정적 위기와 쇠퇴로 더 인기를 얻었습니다. 12도는 그 교육내용이 최고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2도의 중요한 목적은 과거 준비였습니다. 최충의 문헌공도가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과거 시험 합격률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한 사학이 고려 후기에는 국가가 그 운영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그 성격이 조금 모호해집니다. 12도가 국자감보다 인기를 얻게 되면서 12도를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으면 왕권에 위협이 됨에 따라 관학으로 유입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사숙

사학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개인 교육 공간 사숙도 있었습니다. 보편적으로 널리 쓰인 명칭은 아닙니다. 사학 12도와는 별도로 작은 규모로 학생을 지도한 시설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숙교육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숙을 통해서도 많은 학생들이 과거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 왕들의 가장 큰 관심은 유능한 관리의 확보와 왕권 강화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과거 시험을 통하여 좋은 인재를 선발할 수 있을까 고민해 왔고 이것이 학교 교육의 확충을 불러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교육의 본질보다는 시험을 위한 교육에 관심이 집중되어 나중에는 관학과 사학 중 과거 시험에 유리한 곳으로 몰려다니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교육은 과거 합격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성향이 강해, 교육 자체의 본질 부분의 발전은 한계가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고려시대의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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