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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및 교육 정보

삼국시대의 교육

by KEI-C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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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접하는 모든 교육 현상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에 교육학에서도 교육의 역사, 즉 교육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삼국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삼국시대의 특징

동예, 옥저를 비롯한 여러 부족 국가들을 합병하며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율법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삼국은 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역사서를 편찬하였습니다. 또 각 부족들이 지녔던 고유한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하기 위해 불교를 수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서를 편찬하거나 율법을 제정하여 법령을 알려주려면 국민들에게 문해력이 필수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교육제도의 운영이 불가피해졌습니다. 

하지만 좁은 한반도에서 삼국이 힘을 키워나감에 있어 영토의 수복 또한 필요한 것이었고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의 교육에는 이러한 시대적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형성하기 위한 문해 능력과 전쟁을 대비한 무력이 함께 교육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국은 청소년을 문무를 겸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삼국의 교육

물론 부족국가 시기에도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나 '역사'인 만큼 기록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부터 그 교육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교육

고구려의 교육기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로 기록된 태학과 경당이 있습니다. 태학은 고구려의 율법 기초를 만든 소수림왕 2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의 태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입니다. 하지만 태학의 설립 사실 외에 자세한 내용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시 중국에 '태학'이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을 보아 고구려의 태학 또한 중국의 태학과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중국과 고구려가 친밀한 외교관계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태학도 귀족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귀족의 자제들을 태학에 보내어 차세대 관리양성에 힘썼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태학의 교사는 '박사'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 '태학박사'라는 직함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 '한원'에는 태학박사라는 명칭과 함께 국자박사라는 명칭이 함께 기록된 점을 보았을 때, 태학 외에 국자학도 고구려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그 당시 중국에서는 국자학과 태학이 함께 설립되어 양학제가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국자학은 추측할 뿐이고 기록상 설립 사실이 확인된 태학은 고구려의 수도에서 관리양성 기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태학 외에도 '경당'이라는 지방의 교육 시설이 있었습니다. 경당은 지방에 설립된 교육기관, 즉 학교로서 고구려의 지방 곳곳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국당'이라고 기재된 것도 있어 정확한 명칭은 경당이 아니라 국당일 수도 있습니다. 경당이나 국당이라는 명칭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태학이 귀족들의 학교였다면 경당은 가난한 사람도 갈 수 있는 학교였다는 부분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 기록에 의하면 경당은 미혼인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보입니다. 또 교육내용 부분에서 활쏘기와 경서 교육을 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문무의 균형을 중시하는 교육기관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이 당시 무예의 필요성은 전쟁에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볼 때, 경당 또한 국가 주도의 교육기관 즉 관학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백제의 교육

백제의 교육 또한 직접적인 사료는 적어 중국의 사료에 근거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백제 또한 고구려와 유사한 학습 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박사'라는 호칭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사라는 학관의 명칭을 미루어 보면 박사가 가르치는 공간이 존재한 것으로 유추되어 백제 또한 교육기관인 학교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역사 기록에도 백제가 5경이라는 교육내용이 있고, 천자문, 사상서, 사서 등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중국의 기록에도 백제가 활쏘기를 좋아하면서도 글짓기에 정통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의 교육 또한 문무의 균형 잡인 교육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 교육 외에 특이한 부분은 백제에서는 의술이나 역술을 담당하는 박사제도 있다는 부분입니다. 문무 교육뿐 아니라 그 외의 잡학 교육도 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입니다. 기록 사료가 취약하여 백제의 교육 기관이 고구려의 태학과 같은 학교 성격이 강했는지 고구려의 경당과 같이 청소년 단체의 성격이 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제 또한 활발하게 교육이 이루어졌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교육

신라는 학교의 설립은 고구려보다 늦었지만 일찍부터 신라 고유의 교육제도인 화랑도가 있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랑도 이전에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원화제도의 지도자는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원화제가 해체되고 남자가 이끄는 화랑도로 제도가 전환됩니다. 화랑제도는 학교처럼 체계가 있기보다는 마을의 청소년 자생 집단의 성격이었습니다. 동네에서 모범이 되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그 행동을 본받게 하는 수련단체였습니다. 화랑도는 외모와 덕을 보았으며 14세에서 18세의 귀족 자녀들로 이루어진 집안이었습니다. 화랑도는 세속오계를 중심으로 도의 교육을 중시하였습니다.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과 같이 유교적 가르침이 근본이 된 내용도 있으며 임전무퇴, 살생유택 처럼 불교적 가르침이 근본이 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교육은 유교적인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주된 것으로 하여 내부적인 통일감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교육 기관, 학교인 국학은 통일신라 시대에 나타나긴 하지만 화랑도 또한 초기 교육제도로 눈여겨볼 내용입니다. 신라의 교육기관인 화랑제도가 제대로 기틀을 갖춘 학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속오계의 교육 내용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신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세 나라 중 가장 자세하게 역사 내용이 기술되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료에 고구려와 백제의 교육에 관한 기록이 적고 중국 사료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가 자기들 위주로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육이 반드시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특히 고대 국가의 교육에서 학교의 완비를 문제 삼는 것 다소 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교육은 그들의 선택한 것이 아닌 대내외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힘의 세력을 다투어야만 하는 대내외적 상황에서 문무 교육의 강조는 시대적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공식적 기록에 의거 공식적 교육제도를 기반으로 삼국의 교육에 대하여 알아보았지만 이 시대는 불교라는 종교적 교육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불교뿐 아니라 샤머니즘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고대국가에서는 관학 등의 형식 교육보다는 무속이나 불교와 같은 종교적인 비형식 교육의 영향이 서민들에게는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삼국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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